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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의 이웃인가 - 존 스토트

제자훈련 조회 수 2977 추천 수 0 2013.10.21 20:16:55

  누가 나의 이웃인가 - 존 스토트 

누가 나의 이웃인가 - 존 스토트

 

 


존 스토트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이자 신약학자요 저술가. 20세기 최고의 설교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21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케임브리지 리들리 홀에서 목회 수련을 받았으며, 어릴 적부터 다녔던 영국 런던의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 교구 목사로 30여 년 간 섬기면서 강력하고 혁신적인 목회 사역을 수행했다. 영국을 비롯한 범세계적인 복음주의권의 지도자로서 로잔 언약(1974) 입안자로 참여했고, 그 후로도 로잔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 활동해 왔다.

 

 대표적인 저서로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진정한 기독교』,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도행전 강해』, 『로마서 강해』, 『디모데전서·디도서 강해』, 『디모데후서 강해』(이상 IVP), 『기독교의 기본 진리』(생명의 말씀사) 등이 있다.

 

 

 

 

 

 

 

 

 “거짓 그리스도들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예언하셨다. 그리고 거짓 그리스도는 나타나 왔다. 자신들에 대해 거창한 주장을 하는 종교적 협잡꾼들이, 그리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말하는 형편없는 정신병자들이 출몰해 왔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들 - 그를 열광적인 열심당으로, 좌절한 슈퍼스타로 또는 서커스의 어릿광대로 묘사하는 풍자들 - 이 있어왔다. 가까이는 우리 자신 역시 예수님에 대한 많은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나를 따르라”고 그는 말씀하셨다. “예, 주님. 우리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우리는 입심 좋게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예수를 따르고 있는가? 일부 사람들이 따르는 그리스도는 사랑의 그리스도지만 결코 심판하는 그리스도는 아니며, 위로의 그리스도이긴 해도 결코 도전을 주는 그리스도는 아니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복음화 하라는 그의 명령에는 빈틈없는 주의를 기울이지만, 가난한 자, 병든 자, 굶주린 자 그리고 억눌린 자들을 돌보라는 그의 부르심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사도들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함축하는 것이냐 하는 주제를 다루면서 우리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즉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기록했다. 이를 행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달려 있다. 자, 사람들이 꿈꾸어 왔던 대중적인 몽상을 극복하고, 참된 예수, 복음서에 기록된 진정한 예수를 다시 살펴보자.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가 또 믿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예수님의 모범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서 행한 그의 설교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10:38)라는 말로 집약시켰다. 그것은 아름다운 묘사이다. 예수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셨다. 반대로,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모든 환경 속에서 그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셨다.
 베드로가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라고 묘사한 반면에, 마태는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9:35)라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공중 사역의 균형잡힌 모습이다.

 

눈, 마음 그리고 손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행동들이 단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사단의 지배가 몰락되는 징조로서만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또한, 그리고 우선적으로 동정에서 우러나온 평범한 행동이었다. 복음서 기자들은 종종 “동정”이 예수님의 속성이라고 기술한다. 동정은 예수님의 봉사 이면에 있는 최고의 동기였다. 그는 인간적 필요를 보시고 깊이
감동하셨으며, 동정하셨으며, 그래서 행동하셨다.

 

감상이 아닌 봉사
 사랑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인 봉사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속해 말한다. “우리도 형제들[brethren:여러 경우에 있어 그리스도인 형제(Christian brothers)라는 말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듯이 보이는 단어]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의 목숨을 내어버리라는 부르심은 결코 극적인 영웅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어떤 사람은 이러한 것에로 부름받지만). 그것은 평범한 섬김의 행위 (하지만 그것 역시 영웅적 행위 못지 않은 것이긴 하다)를 의미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려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버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는 것도 없고 섬기는 것도 없는 곳에는 - 우리가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크게 나팔을 불어도 - 결코 사랑이란 없다.
 자, 하나하나 살펴보자. 요한은 강력한 논조로 보다 풍족한 개개의 그리스도인에게 그의 원리를 적용한다. 그는 사람을 두 가지 특성을 소유한 것으로 묘사한다. 먼저 그는 “이 세상 재물을 가졌다.” 그리고 둘째로 그는 “그의 형제의 궁핍함을 보았다.” 상황은 이렇다. 즉 그는 “보았으며” 그리고 그는 “가졌다.” 그는 필요를 보았으며 또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는 병든 자를 보았으며 또한 약과 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는 무지를 보았으며 또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굶주림을 보았으며 또한 식량을 가지고 있다. 그는 가난을 보았으며 또한 돈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문 기술의 결핍을 보았으며 또한 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다. 요는 그가 자신의 가진 것을 그가 본 것에 관계시킬 것인지, 아니면 이 둘을 명확히 구분시킬 것인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지 안다. 그는 보았으며, 느꼈으며, 행동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본 것에다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궁핍한 형제에게 “우리의 도와줄 마음을 막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안에 거할까 보냐?”고 요한은 격분하며 말하고 있다. 그 속에는 사랑이 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상이 아니라 봉사이므로 그 속에 사랑이 거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정말 있다면, 우리가 본 것에 우리가 가진 것을 관계시키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져야 한다. 요한이 “말과 혀로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18절) 우리의 사랑을 분명히 나타내자고 하는 힘찬 권유로 말을 맺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순수한 선행
 “선을 행하는 것”은 우리 사랑의 순수한 표현이 되어야만 한다. 진실로, 우리는 사랑이라는 어휘가 타락되어 온 사회 내에서, 사랑은 감상적이거나 이기적인 감정이 아니라 건설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주장해야 한다. 그 때만이 우리의 “선행”은 우리의 빛이 비추이고, 또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을 받게 되는 수단이 될 것이다(마5:16).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사람들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바리새인들의 유희이지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 - 정령주의자, 힌두교도, 회교도, 또는 불교도 - 을 돕는 것을 꺼리지는 않는가? 아니면 적어도 우리가 베푸는 도움을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 마음을 열도록 가슴을 헤집는 지레로 사용하지 않을 때는 그들을 섬기는 것을 꺼리지는 않는가? 물론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복음을 나누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들에 대한 순수한 관심 (우리가 그를 다른 방법들로 도와주는 것을 거부한다면 분명 순수한 관심이 부재한 것이다)에 의해 동기가 유발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수고는 무가치하게 되고 심지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물질적 축복과 영적 부요함, 둘 다를 나누도록 고무한다.

 

무엇을 줄 것인가?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그는 육체없는 영혼도, 영혼없는 육체도 아니며,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격리된 한 개인도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육체적 영적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 만드셨다. 나의 이웃은 사회 속에 있는 영적·육체적 존재(a body - soul - in community)이다. 우리가 이웃의 영혼이나 육체, 또는 사회 중 한 측면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답할지 모른다. 그러면 지상 위임령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 전도라는 최고의 의무를 부여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리고 또한 아니다. 예수님의 지상 위임령 (“가서 ···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은 확실히 전교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세계 복음화의 과제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의 “최고의” 의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것인가? 물론이 말은 부활하신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 곁에 가시기 전에 하신 마지막 말씀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남기신 유일한 명령은 아니었다. 왜 우리들은 이 특정한 명령이 모든 다른 명령에 우선하며 더 나아가 다른 모든 명령을 대신한다고까지 생각하는가? 분명히 가장 큰 계명 - 최소한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의무라는 점에서 - 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이 둘째 가는 큰 계명” - 우리의 전존재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 다음 가는 - 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이웃 사랑을 이웃에 대한 복음 전도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확실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에 의해 성취된 위대한 구원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새로운 차원을 더하였다. 그러한 사건들은 우리의 이웃들과 나누어야 할 새롭고 보배로운 선물 즉 복음을 우리의 손에 쥐어준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또한 우리가 이것을 했다고 해서 할 바를 충분히 다 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심판에 대한 경고
 예수님의 가르침 중 또 한 측면이 언급되어져야 한다. 즉 심판에 대한 그분의 경고이다. 예수님은 선행을 그 분의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셨는데, 그분의 모범과 가르침의 강도를 이보다 더 강화시켜 주는 것은 없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자신의 재림에 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인가가 자기 영광으로” 돌아와서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민족이 그 분 앞에 모일 것이며, 분별하는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선행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 구절은 종종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불려진다. 그러나 이 구절은 비유가 아니다. 그 중 분명히 비유적이거나 상직적인 유일한 요소는 구원받은 자들과 잃어버린 자들을 양과 염소에 비유한 것이다. 이것을 제외하면, 그것은 최후 심판의 매우 엄숙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구절을 우리 자신들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경고가 주는 도전을 회피하려는 여러 가지 교묘한 시도들이 이루어져 왔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느냐에 따라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후 심판이 개인적이기 보다 민족적일 것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한 것처럼 보여지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는 표현은 매우 개인적인 것을 이름하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가 사람들을 당혹케 한다. 우리들의 칭의(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가 행함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 구절은 모순되지 않는가? 그렇다. 우리들의 칭의는 진실로 믿음으로써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경의 신약 기자들은 우리의 믿음이 진실되고, 살아 있으며, 구원받은 믿음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선한 행동으로 표출되어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전술한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우리들의 진정한 태도는 그의 “형제들” - 이는 분명 먼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비록 그 제자들에게만 국한 되는 것은 아니지만 - 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야고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라고 외치고 있다면, 바울은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실재에 관한 유일하게 확고한 증거는 사랑에서 나온 선행이다. 비록 우리의 칭의는 믿음만으로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심판은 행위 즉 선행(“good works" 또는 “well - doing")에 근거하리라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신득의의 교리를 깊이 천착하고 강조한 로마서에서, 또한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영생을 주실 사람은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롬2:7). 마크 가이피어스(Mark Guypearce)가 몇 년 전에 논평한 대로
“어떤 사람의 신앙이 그를 이기심에서 봉사에로 구출해 내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분명히 그를 결코 지옥에서 천국으로 구출해 내지도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좇아
 

 예수님 자신은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본을 따르라고, 그리고 선을 행함으로써, 즉 실제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그를 섬김으로써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의 선행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뢰 -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 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데 인증되어질 증거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우리가 참된 예수를 따르고 그의 발자취를 좇기 시작하려 한다면 선행을 할만한 모든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 사랑이 진실됨을 보여줄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우리 믿음이 진실됨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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